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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발리

발리에도 그렇고 그런 곳이 있다

by 레잇블루머 2015. 5. 31.

발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인가요?

아름다운 바다와 푸르른 논밭, 순수와 친절로 넘쳐흐르는 발리인들의 미소... 이런게 먼저 떠오르시나요? 반자르(Banjar)로 불리는 공동체 커뮤니티가 잘 형성되어 있고 가족, 친족 중심의 사회를 끈끈하게 일궈나가고 있는 발리는 그 많은 관광객들과 서구 자본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정체성과 순수함을 잘 보존해오고 있는 편입니다. 꾸따나 짱구 같은 번화한 지역을 벗어나 조금만 더 깊숙이 발리를 들어가보면 순박하고 착한 발리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지요. 자주 발리를 왕래하면서 정말 나쁜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로 본 적이 잘 없기 때문에 제 머리 속에는 발리를 순수, 정직함 등으로 미화하는 공식이 자리잡았던 듯 싶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의 오해(?)를 살짝 깨뜨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5년전, 제가 한창 발리 관련 창업 준비 중이었던 때였습니다. 갑자기 배우자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생겼습니다. 돈은 쪼들렸지만 발리에서 현지인처럼 살면 생활비를 크게 아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발리에서 몇년 살아보자며 충동적으로 발리로 떠났습니다. 도착해서 우선은 하룻밤에 4만원 정도 하는 3성급 호텔에 머물면서 살 집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인터넷에서 이 집을 발견하였는데 수영장 사이즈도 좋고 가격도 시설에 비해 상당히 괜찮아서 당시 저희를 도와주던 에이전트와 함께 집을 보러 갔습니다. 

 

수영장도 길고 본채 맞은편에 손님용 별채가 있는 훌륭한 구조였습니다. 

 

집주인은 푸트리라는 아주 매력적인 4-50대 발리인 여성으로 이 지역의 관습 또는 유행인지 윗니를 가지런히 갈아서 윗니 아랫부분이 모나지 않고 매끈하게 연결되는 치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자꾸 그 치아로 눈길이 가면서 웃을때마다 예쁘다고 느껴지더군요!) 푸트리는 자기가 얼마나 고심하여 이 집을 꾸몄는지, 공사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 집 근처에 외국인들이 여럿 산다며 이 동네가 아주 안전하고 외국인 친화적이라는 점을 어필하였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별개로 우선 이 집 자체가 - 이 날 날씨가 참 좋았기 때문인지 - 예뻐보였고 가구도 적당히 갖춰진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매우 충동적이라는 큰 단점이 있는데요, 보통 때는 배우자가 그 부분을 방어해줍니다만, 이 날은 어째서인지 배우자가 제 꼬임에 넘어가서 집 계약서에 서명하는 저를 막지 못했습니다. 

 


 

당장 다음날 이사를 왔습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 집에서 첫날 밤을 맞이했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 어두컴컴한 늦은 시각인데 스쿠터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30분 단위로 스쿠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 소리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저는 잠을 설치다가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이 밝았습니다. 지난 밤의 난리는, 제발 나의 꿈이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당시 저희 부부의 전담 기사였던 뿌뚜를 불렀습니다. 집에 필요한 살림살이를 사러 다니기 위해서였지요. 

발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 입니다.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고 대개 깨끗하고 순해보입니다. 

 

발리에는 여러 대형마트가 있습니다만 그 중 우리가 아는 서구식 마트와 가장 흡사한 까르푸(Carrefour)로 향했습니다. 선셋로드까지는 좀 달려야 하는데요, 가는 길에 뿌뚜가 웃으며 묻습니다. 

대체 왜 이 동네에 집을 구했어?

 

웬 뜬금없는 소리지 싶어 무슨 말인지 물었습니다. 뿌뚜가 당황 10%와 진심 웃기다 90%의 미소를 띄우며 답합니다. 

어제 너가 주소 보내줬을 때 깜짝 놀랐어. 여기 다나우 템페잖아. 발리 사람들은 다 알아. 

 

진정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닥쳐올 불운을 직감한 저는 뿌뚜에게 무슨 뜻인지를 캐물었습니다. 그의 말인즉슨, 이 동네는 발리에서 유명한 사창가 중의 하나랍니다. 발리에 이른바 red light zone 이 몇 곳 있는데 저희집이 위치한 바로 그 동네가 그 중 한 곳이었던 것이지요. 패닉해서 뿌뚜 옆자리에 앉아 폭풍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검색 결과들을 보면서 제 머리 속에는 폭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사누르의 바다와 가까운 이 곳은 예로부터 발리섬을 들르는 선원들이 하룻밤 사랑을 찾아 모여드는 곳일뿐만 아니라 꾸따나 르기안의 섹스산업 종사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던 것입니다. 대놓고 호객 행위를 하진 않으나 보통 문지기가 서있고 남성이 도착하면 문을 열어 안으로 들여보내주는 구조라고 합니다. 때문에 소란스럽진 않고 다만 스쿠터 소리가 밤새 들렸던 것이지요. 

이 뒤로는 제가 무슨 정신으로 까르푸를 돌아다녔고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다만 분노에 치밀어 에이전트에게 폭풍 문자를 보내고 당장 푸트리와의 월세 계약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발리에서 에이전트 일을 시작한지 이제 4개월 된 저의 담당 에이전트도 이런 배경에 대해 처음 알았는지 마찬가지로 놀라서 발리 출신의 자기 동료들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합니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자 아유도 집주인에게 상황을 얘기하고 게약 철회를 요구하였으나 세상일이 이렇게 쉽게 돌아갈 리 없지요. 

이런 경우에 대비한 조항이 계약서에는 없었던 관계로 푸트리는 굴하지 않고 1년 월세를 모두 내야한다면서 바득바득 우겼습니다. 저는 집이 위치한 동네의 심각한 위험성을 미리 고지해주지 않았으므로 이 계약은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계속 공방이 이어졌으나 푸트리는 절대 물러설 기미가 없었고 이를 제대로 마무리짓지 않을 경우, 푸트리가 행정당국에 고발시 범법행위로 기록이 남아서 앞으로 발리며 인도네시아 어디든 입국 시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발리에 도착한지 3일째에 꾸따 해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때만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발리에서 이런 경우를 당할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희는 1년 월세의 10%를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하룻밤 자고 한달 월세보다 더 많은 돈을 내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합의를 볼때까지 얼마나 많은 화를 내고 시비를 붙어야했던지요. 중간에서 에이전트도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입니다. 처음에 저희를 일깨운 뿌뚜도 피해를 봤습니다. 사나운 푸트리가 저희가 동네의 실체를 파악한 계기가 뿌뚜였다는 것을 알고 뿌뚜에게 심한 말로 해코지를 한 것이지요. 뿌뚜는 크게 기가 죽어 자기가 괜한 행동을 했다면서 자책했습니다. (이 사건 후 저희는 은인인 뿌뚜를 저희 전속 기사로 계속 고용(?)하고 다른 손님도 연결해주면서 좋은 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지금 와서는 가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때 뿌뚜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1년 마음 편하게 그 집에서 살 수 있었을까? 원효대사가 밤중에 모르고 마셨던 해골물이 달콤하고 시원했던 것처럼, 집창촌이라는 동네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으로서 겉돌면서 그 집에서 살았다면, 어차피 동네 주민들과 어울릴 일도 없었을테니 별 상관이 없었을까?

하지만 저는 알아버렸고 첫날 밤의 스쿠터 소리도 지나치게 잦고 컸습니다. 몇달은 모르고 넘어갔을 수 있으나 결국엔 알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미냑에서 본 신전. 둘 데가 없어 전신주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저도 저 탑에 대고 발리니즈 오퍼링을 하며 신께 빌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뒤 저는 사누르(Sanur) 지역이라면 치를 떠며 그 지역의 반대쪽으로만 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리석지요. 사누르에도 안전하고 좋은 곳이 많이 있는데 말입니다.) 결국 창구의 어느 깊은 곳, 아이들이 뛰놀고 똥개들이 짖는 시골마을 한켠에 있는 빌라를 구했습니다. 이번엔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좀 더 유심히 살피게 되더라고요. 

이 사건을 계기로 저는 발리도 숨은 욕망과 어두운 곳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푸트리는 지금도 그 예쁜 집을 눈먼 외국인들에게 세주고 있겠지요. 저희를 이어 그 집을 계약한 이들은 과연 어땠을지 이따금 궁금해집니다. 

 

사누르의 해변입니다.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와서 노는 분위기입니다.